시기별로 내가 가진 생각이나 느낀 감정들은 일기에 꾸준히 기록하며 종종 꺼내보고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이나 감정들을 밖으로 드러내 본 기억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딱히 그렇게 대단한 생각이나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사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내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그 속에서 빈틈이나 허점을 들키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굳이 드러내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으면 나의 부족한 부분을 모른척하거나 결국에는 잊게 되니 조금은 변화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회고 글을 공개된 장소에 쓰는 것이 나를 드러내기 위한 좋은 시작점이지 않을까 싶어서 글을 올린다.

올해의 고민과 생각들

새로운 환경

올해 드디어 학교를 떠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에 딱히 걱정은 없었다. '그동안 적당히 잘 살아왔으니까, 직장인의 삶도 큰 문제 없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입사 초기에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있는 것부터가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원에서도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공부하곤 했는데, 하루에 8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니 답답하기도 하고 업무 집중도가 높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서 회사 생활에 적응할 때쯤부터는 업무적 고민이 점점 늘어갔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스스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모습이 많이 답답했다.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익숙함, 적응

시간이 지나면서는 자연스레 일을 빠르게 쳐내는 방법이나 속도를 내는 방법을 어느 정도 터득할 수 있었다. 노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익숙함의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슬슬 업무도 익숙해지고 서울에서의 삶도 익숙해지고, 별걱정 없이 별생각 없이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기 시작했다. 환경이 달라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이렇게 빠르게 적응하는구나, 이렇게 빠르게 익숙해지는구나 싶었다. 분명 특별한 일이 없는데 이 시기의 나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마음이 있었고, 점점 일이 일로만 느껴졌고, 주말에는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내거나 자주 늦잠을 잤다. 일이 일로만 느껴지는 것도, 주말에 이렇게 놀면서 푹 쉬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깊게 고민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한 분과 점심을 먹으면서 '나중에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당시에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충 둘러대며 말씀드렸는데, 그 질문을 혼자 계속 곱씹어서 생각해 봐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분명 나는 이런 질문에 곧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제야 내가 지금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상태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글의 중요성

지금까지의 나는 내일, 다음 달, 그리고 내년의 내 모습이, 현재보다 더 성장해 있을 것이라는 장기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단기적으로 나 자신을 믿지 않음으로써 이 장기적인 믿음을 얻어왔다. 단기적으로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에 대해서 자주 의심하면서 더 좋은 방향이 무엇일지 고민해 왔다. 하지만 이 자체가 노력이 필요하고 꽤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는 것에 소홀해졌었고, 내 자신에 대한 단기적인 의심이 사라지다 보니 자연스레 나에 대한 장기적인 믿음 또한 약해진 상태였다. 스스로를 되돌아본 시간이 부족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하루는 날을 잡고 하루 종일 일기를 작성했다. 주말에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서울숲 주변 카페로 가서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 넘게 일기를 정리하면서 '아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지금까지 성장해 왔구나, 그리고 나중에 이런 어른이 되어 있으면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을 다시 해볼 수 있었다. 이후로는 답답했던 마음이 사라져 빠르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이날 해가 질 때쯤 혼자 서울숲을 산책했던 것이 되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비슷한 시기에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책의 글귀 중에서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라는 구절에 많이 공감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좋았던 점들

올해 특히 좋았던 점들은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점이다. 특히, 그동안 못 봤던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직장 생활 중인 대학 친구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울산에 살 때는 너무 멀다 보니 한 번을 만나기가 힘들었는데 서울에 사니 당일에도 약속을 잡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새로운 분들을 만날 기회도 많았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분들도 만나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들도 만나고, 내가 과거에 했던 고민을 지금 겪고 있는 분들도 여럿 만나볼 수 있었다. 이런 다양한 분들과 만나며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점이 좋았다.

한 해를 돌아보며 나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 점이 하나 있다. 새로운 환경으로 오다 보니 올해는 특히 여러 선택의 순간이 많았다.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선택에 의해 앞으로의 방향성이나 성장 속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어, 선택의 순간마다 매번 고민이 많이 되었다. 선택을 내린 뒤에도 '내가 정말 잘 선택한걸까? 다른 선택을 할 걸 그랬나?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후회하며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감정이 요동치고 기분이 급 다운되었던 날들이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최선의 선택은 당시에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통제할 수 없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기에는 20대의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선택 그 자체보다는 이후의 태도와 대처가 중요하다고 믿으며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쭉 돌아보니, 나빴던 선택이던지 좋았던 선택이든지 이후의 내 태도나 대처로 결국에는 나빴던 선택이 내게 큰 영향을 주지 않게 되거나 좋았던 선택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었고, 이 점을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다.

생각의 변화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업무와 관련해서 '동료들끼리 굳이 친할 필요가 있나, 성과만 잘 내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대학원에서도 이런 생각으로 지냈던 것 같다. 올해에는 이런 생각에 대해 스스로 많이 반성했다. 관계가 너무 중요하고, 이것이 더 좋은 성과와 창의성을 만들어내고 더 건강한 팀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건강한 팀도 결국 성과를 만들지 못하고 사라질 수 있지만, 그 뒤에 좋은 사람과의 관계는 여전히 남는다. 결국 전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니 스쳐 가는 관계일지라도 진심을 가지고 대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개선해야 할 점들

개선해야 할 점들이 여전히 너무 많다. 일단 가장 먼저 '나를 더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회고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내가 너무 단순한 사실조차 모르거나 못한다는 사실을 주변의 뛰어난 분들에게 들키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괜히 덜 부족해 보이려고 감추게 된다. 그럼에도 더 드러내야 한다. 원래부터 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향이기도 하고 조심스러운 성향이라 그 갑옷을 벗기가 참 쉽지가 않다. 작년보다는 나아지긴 했지만 또 그렇게 많이 변한 건 아니라서, 솔직히 내년의 내가 변해있을 거라는 믿음은 별로 안간다. 글로 기록해 두면 자주 보면서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겠지 싶고, 내년 회고 때까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더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딱히 중요하지 않다고 믿고, 커리어나 스펙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커리어, 스펙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의 생각이나 실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러한 생각이 너무 과하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도 사실은 꽤 큰 노력과 실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지금의 나는 단지 귀찮거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위로하고자 내면의 실력에 집중하는 척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스펙은 새로운 기회나 경험을 열어주는 무기가 맞기도 하다. 그러니 이러한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이제는 더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다른 분들의 말을 더 집중해서 듣자. 나는 아직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는 척하는 사람이지 싶다. 여러 대화의 상황 속에서 언제나 다른 분들의 의견을 잘 들으려 노력은 하는 편이다. 그런데 대화가 끝나고 난 뒤에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음 저분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정도로 끝난다. 절대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지만,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면 그 뒤로 별 고민 없이 잊는 경우가 있어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마음에서 주니어라는 생각을 버리자. 대학원에서 연구도 리딩해보면서 경력을 쌓기는 했지만, 올해는 '아직 나는 주니어고 실제 일을 하는 건 처음이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종종 있다. 하지만 사회에서 주니어는 없고 누구나 프로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나도 더 프로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나와 다른 더 다양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날 필요가 있다. 힘들었던 시기에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었던 경험들, 내 부족함과 오만한 모습을 깨닫게 된 경험들, 내게 있어 큰 변화를 준 계기와 경험들은 언제나 나로 인한 것이 아니었고 주변의 좋은 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 좋겠고, 누군가 먼저 다가오길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되자. 이 다짐도 매년 생각만 하고 시도는 잘 안 하는 것 같다.

마무리

올해를 한 줄로 정리해 보면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 한 해'인 것 같다. 여기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학교를 벗어나 새로운 사람들을 여럿 만나며 나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많이 알 수 있었던 한 해이고, 사람들과의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많은 깨달음이 있었던 한 해이고,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느끼게 된 한 해였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쯤이면 언제나 내년에 대한 여러 걱정이 가득하지만, 올해는 홀가분한 감정이 많이 섞여 있다. 1년간 기술적으로 충분히 성장했냐는 질문에는 내 수준에서 어느 정도, 어느 방향으로 성장해야 잘 성장한 건지 판단이 안 되어서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발전이 있었냐는 질문에는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억 미화일 수도 있겠지만.. 올해는 최근 몇 년 중에서 제일 웃을 날이 많았다. 주변에 왜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많고, 배울 점이 있는 좋은 분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종종 주변에서 '너는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 같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 힘들 때 의지가 되는 좋은 사람들이 많고, 내가 아무 존재가 아니어도 믿어줄 친구들이 많은데, 조급할게 있나?' 라고 마음속으로만 대답한다. 가까운 친구가 이런 말을 할 때면 '다 너희 덕분이지'라고 대답해 주고 싶긴 한데 한 번도 표현해본 적이 없어서 조금 미안한 것도 있다. 내년에는 지금보다 더 표현할 줄 알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것만큼 힘이 되고 믿음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